2012년 개봉한 영화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감성적으로 풀어낸 작품이자,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조 속에서 장소의 정서적 무게를 잘 활용한 영화로도 기억된다. 오늘은 [건축학개론]의 낭만과 제주도의 풍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특히 극 중 ‘서연’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 위치한 제주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두 주인공의 감정선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체로 작용한다. 이 글에서는 영화의 주요 배경이 된 제주도의 촬영지들을 중심으로, 장소가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또 그 공간을 직접 찾아가며 어떤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건축학개론] 속 제주는 관광 명소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한때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을 기억하게 해주는 특별한 장소로 자리매김한다.
서연의 집 : 섬 속 낡은 주택이 지닌 시간의 무게
영화의 주요 촬영지 중 하나는 ‘제주 서연의 집’으로 불리는 실제 촬영 장소이다. 위치는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제주 동북쪽 숲길 안에 위치한 단독 주택이다. 영화 속에서 이 집은 서연의 아버지가 새롭게 지으려 했던 주택으로, 건축학과 학생 승민이 설계에 참여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집은 처음엔 허물어진 채 방치된 옛 주택의 느낌으로 등장하고, 이후 깔끔한 현대식으로 리모델링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관객 앞에 나타난다. 같은 장소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혀 다른 정서를 주는 방식은 영화의 주요 구성 요소이자, 첫사랑의 기억과 현재의 자신이 만나는 교차점으로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실제로 이 집은 촬영 이후 ‘서연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개방되어, 많은 관람객과 영화 팬들의 발길을 끌었다. 단순한 주택이지만, 입구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숲길, 집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넓은 제주 바다, 나무 데크로 이어진 테라스 등은 매우 감성적인 풍경을 자아내며, 관람자들에게 단순한 영화 촬영지를 넘어 기억과 감정을 되새길 수 있는 장소가 되어 준다. 무엇보다도 집 자체가 누군가의 과거, 누군가의 설계, 누군가의 사랑을 고스란히 간직한 하나의 ‘기억 장치’처럼 존재한다는 점이 이 장소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영화 속 풍경이 된 제주의 골목과 해안도로
서연의 집뿐 아니라 [건축학개론]에는 제주의 다양한 풍경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특히 인물들의 감정이 크게 요동치는 장면은 대부분 제주도의 바다나 골목길, 해안도로 위에서 촬영되었다. 대표적으로 승민이 설계도를 들고 걷던 해변 도로, 서연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작은 길, 승민이 한밤중 서연의 집을 몰래 찾는 장면에서 나오는 제주 밤거리 등은 제주 고유의 조용하면서도 정취 깊은 풍경을 잘 담고 있다. 특히 영화 후반부, 완성된 서연의 집을 바라보며 승민이 묵묵히 감정을 삭이는 장면에서 보여지는 바다는 실제로 제주 구좌읍 평대리 인근 해안으로, 인적이 드물고 자연 그대로의 풍광이 남아 있는 지역이다. 도심의 화려함이나 인위적인 연출 없이, 바람과 파도 소리, 어두운 하늘과 비에 젖은 골목이 주는 감정적 분위기는 영화가 가진 잔잔하고도 강한 여운을 더욱 깊게 만든다. 관람객 입장에서는 이 장소들을 하나하나 직접 걸어보며, 극 중 인물들이 겪은 심정과 맞닿는 감정을 체험해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제주의 촬영지는 따로 안내판이나 표식 없이 자연스럽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더욱 몰입도 있게 ‘영화 속 시간’을 되짚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지금도 SNS에는 [건축학개론] 촬영지 투어를 하며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렸다는 후기가 끊이지 않는다.
장소가 감정의 매개가 되는 방식
[건축학개론]이 사랑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단순히 첫사랑의 서사를 잘 풀어낸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공간과 연결해 전달했다는 점에 있다. 인물들이 오랜 시간 지나 다시 마주하는 곳이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과거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기억의 장소’라는 개념이 잘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제주라는 공간은 그 정서적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한 배경이 된다. 영화 초반 서울의 강남 아파트 내부, 강의실, 그리고 서울 거리 등에서는 인물들의 감정이 꽉 막힌 듯 느껴지고 대사가 중심이 되지만, 제주 장면에서는 공간 자체가 말이 된다. 등장인물의 감정이 드러나지 않아도 풍경이 그것을 말해주는 구조가 자주 등장한다. 승민이 혼자 서연의 집 마당에 앉아 있는 장면, 서연이 새 집을 바라보며 침묵하는 장면 등은 대사 없이도 공간의 분위기와 구성만으로 충분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실제로 서연의 집은 극 중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그리고 미완의 감정을 연결해주는 ‘물리적 통로’ 역할을 하며, 이런 구성은 영화 속 로맨스를 더욱 진정성 있게 만든다. 많은 관객이 제주에서 그 장소들을 다시 찾는 이유는 단지 촬영지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다시 떠올리고 싶어서다. 영화는 끝났지만, 그 감정은 장소에 남아 있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건축학개론’이 되어주는 셈이다.